'여성혐오' 논란이 일었던 그 작품이다
탁현민씨는 계속 청와대에서 근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든 말든 저의 관심은 한 개인으로서의 탁현민씨가 아닙니다. 탁현민씨가 몇 권에 걸친 책에서 쏟아냈던 "더러운 말"들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지난 1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들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가 범죄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런 말을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며, 변화할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 여기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양보 없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없어져야 할 것은 성차별주의이지 페미니즘이 아닙니다.
흉물 논란은 슈즈트리를 변호할 때 가장 큰 난관이다.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적 취향과 정치 소신은 설득으론 돌려놓기 어렵다. 개인의 존재감과 연관된 가치관이어서다. 설령 공공미술이라 한들 만인의 취향을 충족시킬 순 없다. 군말 나오지 않게 하려면 광화문 이순신과 세종대왕처럼 위인상 혹은 포항 과매기, 영덕 대게, 금산 인삼, 청양 고추처럼 곧잘 웃음의 소재로 전락하는 지방 특산품 조형물같은 무색무취한 공공미술만 살아남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무난한 조형물은 충격과 불편한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의 본질과도 먼 거리에 있다.
아마도 80, 90년대, 아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그림을 표현의 자유와 풍자의 프레임으로만 보았을 여성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여성들에게 젠더질서의 변화가 정권교체만큼 중요한 현실이 된 것을 작가는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대통령 스스로 여성비하를 자청하고 있는 시국에서 이런 그림이 가지는 풍자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히려 대통령이 여성임을 부각시키지 않으려 열심히 노력해온 여성들의 활동과 문제의식을 공격하는 혹은 무시하는 수준의 작품이 아닐까? 남성 작가나 국회의원이 여성들의 문제제기를 의식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세상은 끝나가고 있다.
사실 이 작품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작품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자고로 민주 사회라면 그런 실패한 작품을 잘근잘근 씹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이기도 하지만 그 생각을 대중이 씹을 수 있을 자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씹히기도 전에 퇴출되었다. 처음부터 표현의 자유 따윈 아랑곳 하지 않았던 수구세력에 의해 이 작품은 내동댕이쳐졌다. 인격을 모독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위한 자유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코미디나 풍자의 웃음은 약한 자가 저보다 막강한 자를 괴롭히고 골탕 먹이는 힘의 격차에서 발생한다. 만일 그 관계가 역전되면 코미디가 아니라 아무 재미가 없거나 공포물이 될 것이다. '더러운 잠'은 애초에 소재 선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박근혜 스스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마당에 더 이상 풍자할 것이 남아 있지 조차 않다. 수개월 전에 '더러운 잠'이 발표되었다면 세련되지는 못하나 용감하다는 평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러운 잠」은 원본인 「올랭피아」를 조롱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고, 원본이 지닌 의미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올랭피아」가 잘 알려진 그림이고 누드화라서 선택한 것 같다. 풍자의 대상(박근혜)을 누드로 묘사해 희화화하려 한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에러'(에로가 아니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풍자는 항상 해학이란 단어와 붙어 다닌다. 그림을 딱 본 순간 마음 속에 일말의 통쾌함과 웃음이 번지지 않으면 풍자화로서는 실패한 것이다.